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8.33m이다.
정림사는 사비의 시내 한가운데 있던 중요한 절이었다.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두 개의 백제 석탑 중 하나이다. 중국 당(唐) 나라 장군인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탑신(塔身) 4면에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놓아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탑이라는 점이다. 또한 목조탑의 구조를 지녔지만 돌로 표현된 탑으로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을 놓았는데,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2단의 높은 굄대 위에 면석이 놓여 있다. 면석의 높이는 낮고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마련되었으며 8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갑석은 두꺼운데, 이러한 기단부의 형식은 목조건축물 기단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갑석의 상면은 약간 경사졌으며 탑신부를 받는 굄대는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 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3층은 4매석, 4층은 2매석, 5층은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 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두공(공포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더욱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 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일본에 현존하는 호류사[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석탑 연구의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탑에 얽힌 일화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陶俑)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관련 인물
무왕(武王, ?~641)
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 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이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 기간에 왕권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무왕 재위 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은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침공함으로써 백제군이 낙동강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 대의 백제는 국제 문제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화된 왕권의 표징으로, 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歷宮)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되었다. 이 절은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 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절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했고 몸소 불공을 드린 곳으로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 내부의 분쟁 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 :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함)라는 지명과 함께 전하는, 무왕과 신하들이 그 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 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 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던 것이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 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 설화 속의 무강왕과 관련 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 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 설화와 무왕 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首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탑 사찰의 연혁 및 특징
◈ 명 칭 :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지 정 : 사적 제301호 (1983. 3. 26)
◈ 면 적 : 59,245㎡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시 대 : 백제시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현재 정림사(定林寺)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이 사지(寺址)는 창건 당시의 명칭은 사료(史料)에서 찾을 수 없으며 정림사라는 사명은 1942년 일본인에 고려(高麗) 재건시(再建時) 제작사용(製作使用)된 평와(平瓦)중에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문자명(文字銘)이 새겨진 것이 발견 되므로서 붙여진 사명이다. 여기에서 대평(大平) 8년은 요(遼)의 연호이며 고려 현종(顯宗)19년(1028년)에 해이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의 사찰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1980년(年)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당지(金堂址), 중문지(中門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版築技法), 다량의 와당과 격목와(格木瓦) 등이 발견되므로 해서 백제시대의 창건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문자와(文子瓦)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南)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다.
주요 건물간의 거리를 보면 중문, 석탑간의 중심거리가 19.98m, 석탑, 금당간이 26.27m, 금당 , 강당간 중심거리가 31.70m 였으며 배치상 특이한 것은 가람중심부를 둘러싼 회랑의 전형(全形)이 정확한 장방형을 이루지 않고 남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동 , 서 양회랑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엄밀히 말하자면 평면형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각건물의 평면내용을 보면 중문이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인데 건물사면에 차양칸(遮陽間)1칸씩 하층기단에 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불이 건물지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회랑은 군랑(軍廊)으로 장방형(제형형식(梯形形式))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동, 서 회랑의 칸수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 생활용구와 소조불상편(塑造佛像片)이 다수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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