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29대 태종무열왕, 삼국을 통일한 왕은 문무왕이지만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쌓은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죽은 후에 태종이란 묘호를 붙였다. 신라에서 시호인 무열과 묘호인 태종을 함께 사용하는 유일한 왕으로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로,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 특히 외교에 능숙하여 당나라와의 연합을 성사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경주에는 많은 고분이 있지만, 주인이 밝혀진 것은 드물다. 무열왕릉에 들어서며 고분의 주인을 밝히는 태종무열왕릉비, 지금은 몸돌인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의 조각되어 있고,‘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당대 명필이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아버지를 위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인연 맺은 이야기, 옛 고구려 땅인 죽령 이북의 반환 요구를 거절하고 꾀를 내어 고구려에서 빠져나온 이야기, 원효를 요석공주와 인연 맺어준 이야기 등 일화가 많다.
태종무열왕릉비 귀부와 이수의 옛 모습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654~66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무왕 원년(661)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빗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귀부)과 용을 새긴 머릿돌(이수)만 남아 있다.
머릿돌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어, 이 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언제 세운 무덤이며, 누구의 무덤인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신라시대의 능 가운데 정확히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예로 중요한 유물이다.
가로 세로 1.73× 0.86m인 비석좌대 위에 놓인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의 크기는 길이 3.8m, 폭 2.49m, 높이 1.03m이며, 조각된 거북은 극히 사실적인 표현 수법으로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힘차게 뻗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형상이다.
삼국 통일 시기에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신라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거북 등에는 6각의 귀갑(龜甲) 무늬가 뚜렷하고 바깥 부분에는 구름 무늬를 조각하였다.
높이가 1.06m, 폭 1.36m, 두께 0.36m인 머릿돌의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고 전한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비석 조각으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 최대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현재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이 남아 있는 왕릉은 이곳 태종무열왕릉과 성덕왕릉, 흥덕왕릉 정도뿐이다.
※ 신라무열왕릉은 경주 무열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20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