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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가족 발자취/2005년 발자취

[2005년 3월27일-전라남도 구례여행 - 운조루('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길지)]유이주 낙안군수,전라도여행, 가족여행지, 1박2일여행,주말여행,봄꽃여행,산수유축제,구례가볼만한곳, 구례..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8호
지정연도 | 1968년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건립시기 | 1776년(영조 52년)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집을 지 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칸집이었다.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한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 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하지만 세상사 요행은 없는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댓가로 살아가는 사람사는 이치는 동일하다. 사람 살기에 안온한 땅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출처- http://www.unjoru.net/about_1

 

운조루가 위치한 오미동五美洞 은 지리산의 노고단이 진산인 조산이 되고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빠져 내려와 형성된 형제봉이 주산이 된다.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들 앞에는 섬진강이 있으며 섬진강 건너 오봉산이 안산이 된다 그 너머 계족산이 조산이 된다.
동쪽으로는 왕시리봉이 좌청룡이 되며 서쪽으로 천왕봉이 우백호가 된다. 이로서만 보아도 앞으로 물이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배산임수의 명당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조루터는 오래전부터 금귀몰니金龜沒泥의 길지로 알려져 왔으며 운조루 영건시거북돌이 출토된 점에서 널리 알려졌고 집안의 가보로 전해져 오고 있으나 근래에 도난으로 없어졌다.
거북돌을 넣어 두었던 함의 뚜껑에는 집을 짓기 시작한 해인 1776년에 개기 때에 출토되었다고 그 연유를 적고 있다.
창건주인 유이주는 운조루를 지을 당시 낙안군수를 역임한 후이고 상주영장을 지내는 시점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풍수적인 내용을 잘 알고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정황은 앞서 언급한 삼수공행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운조루에 소장된 호구단자 건의 유물을 통해 보면 1774년에는 토지면 구룡정리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룡정리 마을은 현재 파도리로서 유이주의 아들인 유덕호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즉 이곳에 임시로 터를 잡았다가 운조루가 완성되는1776년에 오미동으로 옮겨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문은 1776년에 세워졌지만 얼마 되지 않은 1804년에 한 번 중수되었다.
창건주 유이주 사후 홍살문이 내려져서 중수된 것이다.

현재 대문은 맞배의 솟을대문이지만 최초 모습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합각지붕이다.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솟을대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옛날에는 대문에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난을 맞은 이후 '말 머리뼈'로 대신하고 있다.

 

 

운조루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다.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었다.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이다.
주변으로 각종 연화(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된다.
좌측에 놓인 것이 큰사랑채(外舍)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사랑채(中外舍, 귀래정)이다.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큰사랑채는 남측채 6칸(중문간 포함)과 북측채 2칸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ㅗ'자형이고, 남측채의 동쪽으로 안채의 중문간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외주문(外廚門)이라 했으며 사랑방은 2칸으로 수분실장방(隨分室長房)이라 했다.
수분은 창건주 유이주의 아들 유덕호의 호이다.
사랑방 서쪽에는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택호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서쪽의 누마루는 족한정이라 부른다. 한가롭게 머문다는 의미로 유이주의 대손인 유억(柳億)의 호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북쪽으로 빠져 올라간 익랑을 이긍재라고 불렀다. 유덕양의 일기 <시언> 에서는
이를 서실책방(書室冊房)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하여 여러 사람이 관직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다.
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바로 '他人能解'이다.
타인능해, 즉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
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세 가마니의 쌀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마을의 굶주리는 모든 이를 위해 이 뒤주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창건주 류이주님은 한 달에 한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운조루는 대략 이백여 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시기에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대개는 매년 삼십여 가마의 쌀을 양식 없는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고 한다.

쌀을 얻기 위해 운조루를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여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주는 중간사랑채와 큰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헛칸에 두었다. 주인들과 쉽게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곳에 뒤주를 두고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 뒤주의 사용을 자제했던 모양이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운조루의 뒤주를 양보했다.
오히려 근면하게 노동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결국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의 마음과 뒤주를 여는 일을 자제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한 것이었다.

동학, 여순사건, 6.25 전쟁 등 이 아름다운 마을은 지리산이라는 '큰 산 아래에 산 죄'를 수도 없이 치루었다.
그 힘든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비결은 상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