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자: 1. 2007년6월20일~23일, 가족 4명
2. 2014년5월 4일~ 5일, 가족 3명
아래사진들은 2014년 5월4일 여행사진입니다
신라의 황금기를 구가한 시절로 평가받고 있는 경덕왕(742~765)때에 수많은 불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시작된다. 석굴암, 불국사의 창건, 황룡사 종,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등. 그 숱한 불사 가운데에 최고의 정점을 꼽는다면 단연 석굴암이다. 석굴암(본래 석불사)의 석실 안에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와 여러 제자와 보살들이 그 깨달음의 순간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구현돼 있다. 비록 석실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속속들이 볼 수 없지만, ‘깨달음’을 향해 집중된 순간의 긴장감은 1200년이 넘는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마당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시대의 작품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과 표정이 담기게 마련이라고 한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주변의 보살과 제자들의 형상은 부처의 설법을 듣고자하는 신라인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신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들어선 석굴암에서는 깨달은 순간의 고요와 부처의 절대 미소에 매혹당해, 석굴암 벽 한켠에 보살이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붙박히는 경이로운 체험이 어렵지 않다.
석굴암의 불상 배치
인도의 석굴 양식을 본떠 만들었으나 자연적으로 생기거나 파서 만든 석굴이 아니라 360여 개의 돌을 짜맞추어 내부 공간을 만든 뒤 흙으로 덮어 굴처럼 보이게 만든 인공 석굴이다.
여기에 석굴암의 건축학적 우수성이 드러난다. 내부는 네모난 전실과 원형의 주실, 두 공간으로 크게 구분된다. 모두 40구(2구 분실)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칭 상태로 배열되어,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자아낸다.
전실
천상세계로 통하는 복도와 같은 역할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킴이들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조각들은 모두 힘센 장사나 용감한 무사 또는 눈을 부릅뜬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팔부신중: 가상의 동물들로 인도의 힘있는 신들이었는데,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인왕상: 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에서 수문장의 역할을 맡는다.
사천왕상: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 네 하늘을 관장한다.
팔각 돌기둥: 전실과 주실 사이에 놓여 있다. 석굴암 전체를 떠받히는 기둥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천상과 지상 세계의 경계를 구분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두 기둥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돌을 놓아 동해를 바라보는 본존불의 시야를 가로막고 말았다.
주실
바닥도 천장도 모두 둥근 천상의 세계이다. 주인공은 단연 본존불로, 그 주의의 둥근 벽면에 여러 보살과 제자들이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 있다.
본존불: 높이 3.4m, 대좌까지 합치면 5m나 되는 큰 불상이지만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에게 깨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범천과 제석천: 석가모니를 찬양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우리나라 범천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각 작품으로 꼽힌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행이라는 부처님의 두 가지 덕성을 상징하는 분이다. 석굴암의 문수보살은 발우를 들고 있으며, 옆의 보현보살과 비교하면 귀걸이가 없는 등 옷과 장식들이 비교적 단순하다. 보현보살은 온몸에 찬란한 장신구를 걸쳤으며, 왼손에 경책으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두 보살 모두 중앙의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십대 제자: 모두 머리를 깎고 가사를 두른 채 설법, 수도, 공양 등을 하는 모습이다. 손발 동작, 얼굴 표정 등이 저마다 달라 생동감이 넘친다.
십일면관음보살: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본존불 내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이며 아름다운 신라 여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본존불과의 사이에 작은 5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을 알 수 없다.
감실의 보살상: 본존불의 어깨 높이에 열 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중 2곳이 비어있다. 모두 좌상이다.
연화문 천장 덮개돌: 연화문의 천장 덮개 돌은 무게가 20톤이나 된다. “창건 당시 돌이 떨어져 세 조각으로 깨진 것을 놓고 고심하던 김대성이 꿈을 꾸었는데, 천신이 나타나 깨진 천장을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한다. 지금도 그 균열이 남아 있다.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미당 서정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주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 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오고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날이여.
땅 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 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빛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이 한 마디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끄만 향장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윗속에서
날이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도 내 것이로다.
석굴암의 구조와 신비
석굴암은 전체적인 설계와 공간 배치에서 수학적인 비례 배분과 과학적인 자연 통풍, 온도 및 습기 조절, 모든 조각의 예술적 완성도, 불교 사상에 근거한 설계 등 수리학과 기하학, 건축학, 예술, 종교적 안목과 높은 과학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 완성된 작품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를 하였고, 많은 과학자들이 석굴암의 신비를 벗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신비를 완전히 해독하고 있지 못하다. 깊이 알수록 무서우리만치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불후의 명작이다.
인체에서 각 부의 치수 관계가 10분의 1일 때 가장 아름답고 안정감이 얻어진다고 한다. 이를 ‘균제 비례’라 하는데, 석굴암 본존 불상도 이런 균제 비례가 적용되었다.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본존불을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균제 비례가 적용되는 것이다.본존불은 주실의 한가운데 자리하지 않고 뒤로 약간 물러난 위치에 있다. 만약 본존불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주실이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석굴암은 지하로부터 물이 솟아나와 굴의 바닥 아래를 흐르면서 석굴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다. 그러나 일제의 보수 공사 이후 이와 같은 자연 정화 능력을 잃어버렸다.
본존불의 뒤에 자리잡은 광배는 여느 불상과 달리 불상의 몸체에서 떨어져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또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이는 보통 사람의 눈높이인 160cm에서 보면 원형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주실의 돔은 우주 공간을 축소해 놓았다.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돔의 지름 24척(신라인이 사용한 자의 1척은 29.7cm)은 하루 24시간을 나타낸다. 또한 돔의 중심과 전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은 동남 30도로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서 반구(돔)형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신라인들은 네모난 판석돌 사이에 비녀 모양의 돌못을 만들어 박아 이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주실 천장이 우주처럼 보이는 효과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석굴암이 무너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 세로, 또는 세로 가로의 비율이 1:2인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글·사진 강우방
석굴암의 핵심은 본존 석가여래다. 또 그 핵심은 그 본존 석가여래가 나타내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어두움-무명,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주는 빛이다. 깨달음은 사람의 몸에서는 금빛이 발산되는데 그것이 두광으로 표현되며, 그 중심이 바로 백호이며 얼굴에서는 양 미간의 위에 있다. 하나의 긴 흰 털이 오른쪽으로 말리고 있으며 백옥과 같은 빛을 끊임없이 발산한다. 말하자면 백호는 빛의 근원이며 만물이 지니고 있는 기의 표현인 소용돌이 무늬로 나타낸 것인데, 실제로는 백옥인 투명한 수정을 감입한다. 석굴암의 백호 자리에는 금박을 깔고 수정을 감입해 금빛이 나도록 했다. 삼십이상 가운데 하나. 바로 그 자리는 후에 제 삼의 눈, 즉 마음의 눈이 자리잡는다. 바로 그 자리가 일체를 만드는 마음의 자리다.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석굴암의 핵심은 본존 석가여래이고, 그 존재의 핵심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여 깨달음에 이른 원만한 모습이다.
석굴암 천장의 천개석
천개석은 왜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는가.
김대성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이 완성될 즈음, 마지막 작업을 위해 큰 돌 하나를 다듬어 천개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노쇠하고 지칠 대로 지친 대성은 낙담 끝에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덮쳐 오는 피로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 그 큰 조각 난 돌을 올려 놓고 돌아간다.
떨어뜨려서 깨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천개석은 그 당시 공사 중에 깨진 것만은 틀림없다. 김대성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하늘이 깨진 것을 그대로 올려 놓았으니 천인합일 사상이 이 천개석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아롱져 있다.
석굴암 본존의 왼손
싯다르타 태자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선정인의 자세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으면서 오른손을 내려 향마촉지인을 취하며 악마를 물리친다. 왼손은 원래 선정인 때의 모습 그대로다.
본존의 항마촉지인을 취한 오른손
우리의 미술과 공예 고유섭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 안 될 작품으로 경주의 석굴암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 그곳에는 팔부중상이 있고 인왕이 있고 사천왕이 있고 사보살이 있고 십대제자가 있고 관음이 있고 팔대보살이 있고 석가원상이 있다.(중략)
거대한 연화대좌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9척 고상高像이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으로 온엄溫嚴한 봉안鳳眼을 반개半開하고 동해 창파蒼波를 굽어 살펴 진좌鎭坐하신 위용! 결가부좌結跏趺坐하신 족상足相도 안평구원安平具圓 하시거니와 무릎도 섬세한 듯 둥글고 무릎까지 뻗어 내린 긴 손도 살찐 듯 부드럽고 온화하시거니와 양어깨 양팔도 풍만원융豊滿圓融하시고 가슴도 평정장엄하시거니와 등줄기도 곧고 엄숙하시고 귓밥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도 두툼하니 내리셨거니와 콧날도 우뚝하시고 눈동자도 빼어나거니와 머리도 원만하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마음도 없고 정情도 없는 화강 거석 花崗 巨石에서 맥박이 충일하고 신성神性이 횡일橫溢하고 호흡이 가지런하고 온엄溫嚴이 구비된 위상偉像이 드러날 때 환희歡喜는 조공彫工의 손에 있지 아니하고 신라천지를 휩쌌을 것이요 우주 속에 메아리쳐 퍼졌을 것이다.
(중략)
대개 불상의 후면 광배光背는 원상圓像에 직접 부착되어 있는 까닭에 매우 공예적 고정성과 비현실적 부자연성이 많은 것이지만 이 불상의 배광背光은 원상과 멀리 떨어져 따로이 벽면에 가 붙어 있는 까닭에 이상의 결점이 사라졌을 뿐더러 관자觀者의 행보위치를 따라 자유로이 유동되어 급기야 원상 직전에 다다라 온안溫顔을 인관印觀할 때는 전자의 배광이 어느덧 정상의 연화蓮花로 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이것이 천정최정天井最頂에 남아있는 일타연화一朶蓮花의 존재 이유이다. 이와 같이 배광이 본체에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체를 항상 떠나지 않고 비치고 있는 곳에 다른 어느 조각품에서도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일반 불상 조각이 그 객관적 소재성에서 받는 불가피의 고정감을 끝까지 버리고 이와 같이 자연적 사실성을 살려 유동성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경탄할 신기神技라 아니 할 수 없다.
발췌 : <고유섭전집2>, 통문관, 1993
“우현 고유섭은 한국미술사 및 미학사의 주춧돌과 같은 인물이다. 일본인들에 의해서만 관심이 되고 연구되어 오던 한국미술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최초로 손을 댄 이가 우현이요, 이것을 어지간이나마 완성시킨 이가 또한 우현이다. 그의 《조선미술문화논총》, 《한국미술사 및 미술논고》, 《조선탑파의 연구》, 《고려청자》 등은 이미 한국 미술의 고전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현의 명문이라면 〈한국미술 문화의 몇몇 성격〉이라든가 〈한국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 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글은 뒷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번 논의되어 왔고 ‘구수함’이라든가 ‘맵자함’, ‘적막함’이라는 유의 특질분석은 이미 지양되어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학과 조선미술사를 계통 있게 연구하신 유일한 국보적 존재”인 고유섭은 1905년 인천에서 태어나 경성 보성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뒤, 개성부립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에 출강하였으며,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둔 1944년 6월에 영안하였다. 통문관에서 《고유섭전집1~4》이 나왔다.(1993)
사진:강우방(미술사학자,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현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야나기 무네요시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도 또한 안(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불타는 숙연히 그 부동의 모습을 연화대좌 위에 갖춘다. 우러러보는 자는 그 모습의 장엄과 미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는 전부 안(내면)인 영(靈)의 세계이다. 그는 앞에 네 사람의 여보살을, 뒤에는 십일면관음을, 그리고 좌우에는 그가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영원의 영광을 고한다. 감실에 있는 여러 부처는 그 법열을 찬송하는 듯하다. 여기는 밖(석굴밖)인 힘의 세계는 아니다. 안(내면적)인 깊이의 세계다. 미와 평화의 시현이다. 또한 장엄과 그윽함의 영기(
靈氣)다.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의 안팎에 나타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간다. 동(動)에서 정靜(고요)으로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굴원에서 다하는 듯한 느낌이다.(중략)
굴원 깊숙이 관음상 앞에 다가서면, 잠시 마음은 정화되고 사랑의 세계에 소생한다. 얼마나 주의 깊게도 작자는 사람의 마음에 대비하였던가! 엄숙하고도 깊고 무거운 열 개의 조각 한가운데 한 여성이 조용히 서 있다. 어느 누가 그녀의 자비로운 염원을 그 얼굴에서 읽지 않을 수 있을것인가! 작자는 이 조상을 새김에 있어 얼마나 정한 기쁨을 느꼈을까? 설사 그 형식에서 새로운 요소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작품은 영원한 마음의 징표이다.
나는 이제 나머지 하나, 이 굴원의 중앙을 차지하는 불타의 좌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의 뜻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에 바로 이 조상(彫像)의 미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런 착찹한 수법도 볼 수 없다. 그를 덮은 옷의 선도 가까스로 셀 수 있을 따름이다. 좌선하는 그의 가슴은 단정하고, 얼굴은 앞을 향했으며, 한 손은 꺽어서 가슴 아래에 놓고, 다른 손은 그저 드리워 앞에 있을 뿐, 이것이 작자가 준 외형이다.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성도 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실로 아무것도 없는 지순(至純)의 그 속에서 작자는 불타로서의 지고(至高)와 위엄을 정확히 포착했고, 그것을 정확히 표현 할 수 있었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얼굴에 집중된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감은 눈은 쉬는 듯하다. 그는 그윽하고 고요한 이 굴원 속에 앉아서 참으로 깊은 선(禪)의 세계에 잠겨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일체를 안은 무(無)의 경지이다. 그 어떤 진실이, 그 어떤 미가 이 찰나를 초월할 것인가. 그의 얼굴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깊이로써 빛나지 않는가! 나는 많은 불타의 좌상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비를 간직하는 영원한 하나이리라. 나는 이 좌상을 거쳐서 조선이 지난날에 맛볼 수 있었던 바 불교가 심대하였음을 믿는 터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 있어서는 종교도 예술도 하나이다. 우리는 미에서 참을 맛보고, 참에서 미를 즐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이 글을 1919년 〈예술〉지 6월호에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라는 논제로 실었다.-야나기 무네요시, 〈한국과 그 예술〉, 지식산업사, 1974/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1996에도 이 글이 수록되어 있다.
위 사진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감흥을 받았을 당시의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의 옛 모습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본래 ‘석불사’라는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속한 암자가 되면서 석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등장하는 몇몇 기록 또는 그림 속에 석굴암 또는 석불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유물의 중대성에 비해 그 기록은 미미한 편이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 채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상태로 방치된 듯하다. 그러다 일제시대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우연히 석굴암을 발견한 것이 일본인들 사이에 ‘토함산에 보물이 있다’는 식의 소문으로 돌면서, 도굴꾼들은 경주와 토함산으로 몰려오게 된다. 도굴꾼들은 우선 운반이 쉬운 조각상을 두 점 떼어갔는데, 그것이 바로 감실 안의 보살상이다. 이 조각은 석굴암의 여러 조각 가운데에서도 단연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일제는 도굴을 막고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1913년에서 1915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철저한 고증 없이 복원하여, 석굴암의 본래 구조와 조각들의 위치를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를 마구잡이로 사용하여 석굴암이 본래 지니고 있던 환기와 습기 조절 능력을 훼손하여 지금까지도 석굴암을 보존하는 데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아래사진들은 2007년6월20일~23일 여행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