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자: 1. 2007년6월20일~23일, 가족 4명
2. 2014년5월 4일~ 5일, 가족 3명
아래사진들은 2014년 5월4일 첨성대 여행사진입니다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했던 분황사, 좁은 경내에 석탑과 신라시대의 우물, 비석받침돌밖에 없지만, 선덕여왕 3년(634)에 세운 신라 명찰 중 하나로 여왕의 향기가 물씬 나는 이름으로, 향기 '분'자에 황제 '황'자를 써 분황사로 칭했다.
발굴조사로 보아 황룡사에 버금가는 크기였던 분황사는 호국사찰인 황룡사와 함께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국찰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몽골군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었고,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과, 조선시대에 세워진 보광전만이 남게 되었다.
자장과 원효가 거쳐 간 절로도 유명하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며, 경덕왕 때는 ‘희명’이라는 다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의 그림도 유명하다.
용이 사는 우물‘삼룡변어정'은 신라시대 때부터 사용해왔다고 하며, 우물 한 쪽에는 이 절에서 주석하였던 신라의 고승 원효를 기리기 위해 고려 때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한 뒤 ‘차화정국사지비부(此和靜國師之碑趺)’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분황사 출토 유물>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자장과 원효 스님이 계셨던 매우 큰 절이었다.
분황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를 조사한 결과, 분황사는 1탑 3금당의 품(品) 자형 가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품(品) 자형 가람 배치는 신라 문화권에서는 처음 밝혀진 것이다.
분황사 뒷담에서 출토된 머리 없는 불상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으며, 그 밖의 출토 유물은 대부분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 종류로서 1,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사리장엄구>
1915년 분황사석탑을 해체 보수 작업할 때에 석함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일상 생활 용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위, 금바늘, 은바늘, 침통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탑이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던 점과 관련하여 볼 때, 바늘이나 침통은 선덕여왕이 넣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사리장엄구는 당시의 시대성과 높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유물이다.
사리석함 상면 드잡이 홈
사리석함 내부 배수공
사리석함 뚜껑 가로 63cm, 세로 63cm
사리석함 가로 73cm, 세로 76cm
1915년 해체·수리시 2층 탑신 중앙에서 화강암 사리석함이 발견되었다.
금동장신구(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골각제장신구(骨角製裝身具)
사리장엄구-구슬·옥·수정(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리장엄구(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바늘(針)
아래사진들은 2007년6월20일~23일 여행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