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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공주여행]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 공산성 (사적 제 12호)

공산성

  • 주소 : 충남 공주시 금성동 66-4
  • 전화 : 041)856-7700
  •  
  • 이용시간  : 09:00 ~ 18:00 (설날 및 추석당일 휴무)
  • 이용요금  : 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단체 20인 이상 1,100원, 700원, 500원)
  • 주차시설  : 무료(승용차, 버스)
  • 교  통  : 공주종합터미널에서 101번이나 125번 시내버스를 이용

▲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서울 한산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성왕(聖王) 16년(538)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웅진시대의 방어거점이었던 산성이다.

공산성은 웅진성, 쌍수산성, 공산산성, 공주산성 등 여러 이름이 있어 시대적인 변천을 알 수 있다. 웅진성이란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공주가 웅진으로 불릴 때의 이름이며, 그후 고려 초기 전국적으로 난을 피하여 인조(仁祖)가 공주에 파천한 이후로 왕에게 쌍수의 이름을 받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불렀다.

원래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인 세종 14년(1432) 이전에는 이미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듯하고, 선조 29년(1596), 선조 36년에 고친 기록이 있으니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한 듯하다. 현재도 일부는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되어 있다.

공산성은 금강에 접하여 길이 약 800m의 장축을 북서-남동으로 두고 금강의 남안에 자리하고 있는 표고 85m와 110m 두개의 산봉우리와 금강(錦江)의 단애(斷崖)를 이용하여 만든 포곡식 산성이다. 이중 석축부분은 1,930m, 토축부분은 730m에 달하는데 동남부에서는 이중이다.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6m이며 너비가 3m정도인데 밖은 급경사를 이루고 안쪽은 내탁공법(內托工法)을 썼으므로 안쪽으로 넓고 깊은 호(濠)가 있다.

성곽의 부대시설로 사방에 문지가 확인되는데 현재는 남쪽 진남루와 북쪽 공북루의 문루가 남아있고, 동∙서쪽으로는 자리만 확인된다. 그밖에 치(雉)나 적대(敵臺) 등의 시설은 보수가 많이 이루어진 탓인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 안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사찰로 유명한 영은사(靈隱寺), 인조가 파천때 머물렀던 기념으로 세웠던 쌍수정, 성내의 중군영의 문루였던 광복루가 있다. 또 정유재란때 주민을 안무(按舞)하였던 명의 세장군의 업적을 기린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내려온 사실을 적은 쌍수산성 주필사적비가 있다. 이중 명국삼장비는 일제말기 공주읍사무소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이 되자 이곳에 옮겨 놓았다.

공산성의 성격에 대하여는 군사적 목적을 가진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한편으로는 무녕왕(武寧王)의 지석에 나오는 방위나 기타 자료를 들어 웅진시대의 왕궁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공북루는 공산성이 금강에 임하고 있는 도하(渡河)지점에 세워져 있으며 남쪽에 위치한 진남루에 대하여 북문의 기능을 갖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큰 문루건축이어서 상층에는 루(樓)마루를 깔았고 하층은 통행로로 삼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기둥을 3렬로 배열하였는데 북쪽으로 강에 면하고 있는 주열(柱列)에는 팔각주를 사용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그 대신 자우로 연결된 석축성벽이 북쪽으로 꺾어지면서 주위를 차단하였으며 중앙칸만을 통행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상층 루(樓)마루 4면에는 청판을 끼운 낮은 난간을 돌리고 있을 뿐이며 처마 밑의 결구방법도 공포와 창방(昌枋)을 생략하고 기둥머리고 직접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앞 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상부에 주두를 배치하여 종량(宗樑)을 받쳤는데 이 종량 위에 있는 파련대공(波蓮臺工)에는 뜬 창방이 첨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