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석성으로,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성지동 남강로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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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번호 :사적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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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시간 :하절기(3월~10월) 05:00 ~ 23:00동절기(11월~2월) 05:00 ~ 22:00
석성(둘레 1,760m)으로 축조된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
- 규모 : 면적 171,805㎡
- 진주성은 한국관광 100선에 8년 연속 선정되었다.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592년 임진왜란 때 3,800여 명의 적은 군사로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
왜란 3대첩지의 하나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성내에 있다.)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 입니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여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공북문은 2002년 5월 1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김시민장군 동상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을 이루었으며, 충무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일명 제씨 쌍충비(諸氏雙忠碑)로도 불리는 이 비는 본래 진주성 안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관헌들에 의해 문산가도(文山街道)에 옮겨졌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새로 지었다.
비의 형태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키어 머리를 맞대고 중앙의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하단에 4개의 국화무늬를 조각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귀부(龜趺)는 이수의 조각이나 비의 규모와는 달리 등을 아무런 꾸밈이 없는 방형으로 처리하고, 돌출된 두 눈을 강조하여 토속적인 정감을 주고 있어 진주성 안의 다른 귀부들과 더불어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 제말(星州牧使 諸沫)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제말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웅천(熊川), 김해(金海), 의령(宜寧) 등지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함께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성주(星州)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이고 그의 조카가 되는 제홍록 장군은 숙부 제말 장군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충무공(李忠武公)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에 전사하였다. 이에 정조(正祖)임금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吏曹判書 徐有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雙忠閣)이라 이름하여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하였다.
두전(頭篆)은 송하 조윤형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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